공부의 칼끝 10. 파초신심(芭蕉新心) : 새 잎을 펼치자 새 심지가 돋는다
이태준의 수필집 『무서록』에 「파초」란 글이 있다. 여름날 서재에 누워 파초 잎에 후득이는 빗방울 소리를 들을 때 ‘가슴에 비가 뿌리되 옷은 젖지 않는 그 서늘한’을 아껴 파초를 가꾸노라고 썼다. 없는 살림에도 소 선지에 생선 씻은 물, 깻묵 같은 것을 거름으로 주어 성북동에서 제일 큰 파초를 길러 낸 일을 자랑스러워했다. 앞집에서 비싼 값에 사갈 테니 그 돈으로 새로 지은 서재에 챙이나 해 다는 것이 어떻겠느냐 해도, 챙을 달면 파초에 비 젖는 소리를 못 듣는다며 들은 채도 않았다. 당시까지만 해도 서울에서 파초 기르는 것이 쾌 유행했던 모양이다.
파초 잎에 시를 쓰며 여름을 나는 일은 선비의 운사(韻事)로 쳤다. 여린 파초 잎을 따서 그 위에 당나라 왕유의 「망천절구(輞川絶句)」 시를 쓴다. 곁에서 먹을 갈고 있던 아이가 갖고 싶어 한다. 냉큼 건네주면서 대신 호랑나비를 잡아오게 한다. 머리와 더듬이, 눈과 날개의 빛깔을 찬찬히 관찰하다가 꽃 사이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을 향해 날려 보낸다. 이덕무의 『선귤당농소(蟬橘堂濃笑)』에 나오는 아름다운 광경이다. 이런 운치 말고도 옛 선비들이 파초를 아껴 가꾼 것은 끊임없이 새잎을 밀고 올라오는 자강불식(自强不息)의 정신을 높이 산 까닭이다.
잎이 퍼져 옆으로 누우면 가운데 심지에서 어느새 새 잎이 밀고 나온다. 공부하는 사람의 마음가짐도 늘 이렇듯 중단 없는 노력과 정진을 통해 키가 쑥쑥 커 나가는 법이다.
-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 끝_『일침(一針)』, 정민,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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