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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두성 교수의 글/마음이 부자인 사람들 모임

글4. 행복이란, 그리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

글4. 행복이란, 그리고 어떻게 행복하게 살 것인가.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게 살기를 원한다. 우리 삶의 궁극적 목적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행복하게 살기를 원하지만, 딱 꼬집어서 행복이 무엇이며,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가를 아는 것도 필요하겠다

행복은 얻거나 잃을 수 있는 사물이나 실체가 있는 것이 아니라, 행복은 삶의 방식이다. 그리고 행복은 말 그대로 행운이 나에게 임하는 복이다. 가만히 있는데 그저 오는 것은 아니다. 행복한 삶을 살기를 원한다면 행운이 나에게 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 복을 누릴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 행복을 실체가 있는 것처럼 잡으려고 해서는 행복해 질 수가 없다. 그리고 무엇인가를 이루어서 얻겠다고 해도 얻을 수 없다. 행복은 행복해 질 수 있는 방식으로 살아야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것이다. 예를 들면 부부지간이나 친한 친구지간이나 친척지간에도 서로가 계속해서 친하게 지나고 행복을 같이 누리며 살고자 한다면, 서로 간에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서로가 신경을 써주고 감사할 줄 알고 챙겨 줄 줄 알아야 한다. 나는 그만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당연한 줄 알고, 남은 나에게 왜 안 챙겨 주나 하고 기다리며 서운해 한다면 행운은 그리고 복은 오지 않는다. 내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면 주어진 것에 충실하면서 만족할 줄 알고, 모든 것에 감사할 줄 알고, 내가 먼저 베풀 줄 아는 삶을 사는 것, 이것이 행복해 질 수 있는 삶의 방식이라 생각한다.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잘 산다, 잘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적으로 우리는 행복하게 살기 위해서는 평소의 생활에서 무언가 실체를 잡으려고만 하지 말고, 무언가 이루려고만 하지 말고, 잘 살아야 하고, 나 자신에게나 남에게나 잘 해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산다면, 지금까지의 슬픔이나 걱정이나 불행, 심지어 심신의 질병까지 자연히 사라진다. 왜냐하면 어두움에 빛이 들면 어두움은 자연스럽게 사라지고 주변이 환해지듯, 행복이 우리의 삶에 찾아오면 모든 부정적인 것들은 자연히 사라지기 때문이다. 행복을 가꾸며 살아가는 사람의 몸과 마음은 밝고 환한 좋은 에너지가 가득차고, 흘러 넘치기 때문에 모든 안 좋은 것들은 새벽이 오면 어두움이 사라지듯 저절로 사라지고 심신도 건강해 질 수 밖에 없다.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 철학자들이 이야기한 행복의 노하우를 몇 가지 알아본다.

행복 노하우, 하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이 사는 목적이 무엇이냐를 물으면서 사람이 살아가는 것은 궁극 목적을 찾아가는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삶의 궁극목적이 되려면 그 조건이 성립되어야 되는데 첫째는 궁극성(보다 더 높은 것이 없는 최후의 목적)이 있어야 되며, 둘째는 완전성(더 보탤 것이 없는 마지막의 것)이 있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이 두 조건을 만족 시킬 수 있다고 생각되는 후보들을 살펴보면 일반적으로 행복을 논할 때 예를 잘 들어서 설명하는 네 가지를 생각해 본다. 쾌락, 명예, , 사랑이다. 물론 이것들을 가지면 기뼈고 즐겁다. 그리고 일정기간 동안은 충분한 만족감을 가질 수 있다. 그러나 이 후보들은 일정기간이 지나면 거의가 다시 불포만감, 불만족감이 생긴다. 이것들이 궁극성과 완전성을 가진 삶의 목적이 될 수 있는지를 보자.

쾌락- 쾌락은 궁극성이 없다. 그리고 완전성도 없다. 아무리 좋고 즐거운 일이 있더라도 다른 조건이 있어서 내가 포기하고 싶으면 금방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쾌락이다. 예를 들면 남편이 즐겁고 좋은 일이 있더라도 아내나 가족을 위해서라면 그 쾌락을 포기할 수 있다. 그리고 아내도 마찬가지로 내가 지금 즐거운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남편을 생각하고 자식들을 생각하고는 그 쾌락을 당장 포기할 수 있다. 자식을 위해서라면 대부분의 부모들이 자신들의 쾌락(즐거움)을 많은 부분을 포기할 것이다. 그리고 쾌락이라고 하는 것은 어느 기간 동안은 기분이 좋고 즐거워할 수 있을 지라도 이것이 나중에는 오히려 기분을 나쁘게도 하고 나와 남까지도 어려운 지경으로 만들 수도 있다. 때로는 금전적으로 손해를 끼칠 수도 있다. 때문에 쾌락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될 수가 없다.

명예- 명예도 궁극성과 완전성은 없다. 돈을 위해서 명예는 쉽게 포기할 수가 있다. 근년에 들어서는 인생의 가치에 명예의 가치보다 돈의 가치에 더욱 무게를 두는 현상이 많이 들어나는 것을 볼 수 있다. 옛날을 말하자면 돈 보다는 명예를 소중히 생각했고, 돈은 별로 없어도 명예가 있는 사람을 더욱 존경했으나 작금에는 돈이 없는 명예는 공허하다고 할 수 있는 상황이다. 실제로 주변에 명예가 꽤 좋으신 분인데도 그 분은 친구들 모임에나 어떤 모임에서 당당하지를 못하다. 정말 명예의 가치가 많이 떨어진 시대인가보다. 그리고 명예는 그다지 길지 않는 시간이 지나게 되면 자연스럽게 소멸되기도 한다. 명예는 조금만 과욕을 부리게 되면 금방 명예는 도망가 버리기도 한다.

재물- 재물도 궁극성과 완전성은 없다. 명예를 위해서 재물을 포기할 수도 있고, 사랑을 위해서도 재물을 포기할 수가 있다. 재물도 또한 있다가도 없어지기도 하는 것이 재물이다. 특히 돈은 사람들이 제일 선호하는 것인데 누구든 대부분의 사람들은 돈의 욕심은 한계가 없다고 한다. 지금보다 좀 더 크고 좋은 집, 지금 타고 다니는 자동차 보다 좀더 크고 좋은 차 등등 재물 중에서도 집이나, 자동차의 사례를 이야기 하기가 쉬운데 집이나 자동차를 바꿀 때는 분명히 기뼈고 즐거우나 일정 시간이 지날수록 그 기쁨은 줄어들고 나중에는 완전히 사라지면서 또 다시 좀 더 큰, 좀 더 좋은 것을 찾게 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의 욕심은 한계가 없다는 것은 틀림없는 것 같다. 그리고 재물은 조금만 잘못 다스리면 사방으로부터 욕을 먹는 경우도 많아서 궁극성으로나 완전성하고는 거리가 멀다.

사랑- 사랑도 마찬가지로 궁극성과 완전성은 없다. 사랑이 밥 먹여주나 하면서 돈을 위해 사랑을 포기할 수도 있다. 사랑은 우리들의 마음이 결정 하는데로 얻을 수도 있고 잃을 수도 있는 실체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우리의 마음도 변화여 늘 또 다른 것을 가지기를 바라며, 더 많이 가지기를 바라게 된다. 이와같이 불실체는 변화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궁극성과 완전성이 없기 때문에 인생의 궁극적 목적은 될 수가 없다고 하였다.

행복- 행복은 궁극성과 완전성을 가지고 있다. 행복은 끝이다. 다른 모든 것 쾌락이다, 명예다, 돈이다, 사랑이다라고 하는 것들은 인생의 궁극 목적인 행복한 삶을 살아가는 하나의 수단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들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이러한 것들을 원하고 또 가지게 되면 영원히는 아니지만 한동안은 만족감을 가지며 행복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인생의 궁극 목적이 돈이나 명예나 즐거움을 쫓는 오락이나 에로스적인 사랑이 아닌 것은 또한 분명하다. 해마다 세계적인 잡지에서 행복지수가 높은 나라별로 순위를 매겨서 발표하는 자료를 보면 오히려 부자나라 보다도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의 행복지수가 높은 것을 보면 행복은 위에서 나열한 것들을 가진 순서가 아님이 확실하다.

우리 삶의 목적은 늘 행복하게 사는 것이고 결국 우리가 궁극적으로 추구해야 할 것은 행복이다. 그러면 행복하게 산다는 것이란 무엇인가?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위에서 예를 든 네가지, 돈 사랑 명예 쾌락등과 같은, 있다가도 없어질 수 있는 불실체를 얻고자 그기에만 빠져서 살지 않고, 일상의 살아가는 방식 가운데에서 마음의 충만한 만족감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삶의 방식을 보자, 인간은 영양섭취를 하고 자손을 번식 시키고자 한다. 이것은 동물도 식물도 하고 있다. 그리고 인간은 욕구와 욕망이 있고 오감을 가진 감각을 느낄 수 있다. 이것은 동물도 가지고 있고 동물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식물과 동물과 다르게 이성을 발휘하고 또 생각을 가졌다. 그래서 인간을 이성적 동물이라 한다. 그러므로 인간이 행복한 삶을 살려면 이성적으로 살아가는 것이 잘 사는 것이고,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했다.

이성을 발휘하고 잘 생각하며 살면 덕성이 생긴다고 한다. 그러면 덕을 가지고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지나침이나 모자람이 없는 중용을 지키면서 사는 것을 말한다. 즉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행복한 삶은 늘 이성적으로 사는 삶, 중용의 덕을 가지고 사는 삶이라고 했다. 그리고 행복은 중용을 실천할 때 찾아오는 행운이라고 했다.

행복 노하우,

이번에는 철학자 칸트는 우리가 어떻게 하면 행복하게 살 수 있는지를 설명한 그의 행복론을 살펴본다.

기존에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이나 태도를 코페르니쿠스적인 전환을 하라고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당시 까지 태양이 지구를 중심으로 돈다(천동설)는 설을 완전히 뒤집어서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돌고 있다(지동설)고 주장했다. 결국 자기 확신을 굽히지 않다가 화형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가 죽으면서도 했던 말이 유명하다. “그래도 지구는 지금도 돌고 있다.“고 했다. 코페르니쿠스는 지금까지의 정설을 완전히 뒤집어 버렸다. 당시로서는 엄청난 변화된 주장이었다. 특히 당시 종교적으로는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으로 죽음을 불사하는 주장이었다. 여기에서 우리가 배우고자하는 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가지고 있던 삶의 사고방식과 태도를 완전하게 바꾸어 보자는 의미이다.

철학자 칸트는 세계, 즉 외부세계가 가지고 있는 인식이 개별 인간의 인식을 결정한다고 하는 설을 완전히 뒤집어서 인간의 인식이 외부세계의 인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외부세계의 사실이 인간의 인식의 틀 안에 들어 왔을 때 인간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개념의 틀과 시간과 공간인식의 틀을 통과 하면서 사람마다 각자의 인식을 만들어 낸다. 예를 들어서 설명하면, 떡을 만들기 위하여 쌀가루를 떡기계() 안에 붇고 떡을 만들 때 네모난 틀에 가루를 넣고 떡을 만들면 결과는 네모난 떡이 나올 것이며, 둥근 틀에 가루를 넣고 만들면 둥근 떡이 나올 것이다. 이와같이 인간의 사고의 틀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가 외부세계로부터 들어오는 사실의 재료들을 가지고 각자의 사고방식의 틀에 넣었을 때 우리의 사고방식의 틀이 네모난 틀이면 네모난 인식이 만들어 지며, 둥근 틀이면 둥근 인식이 만들어 진다는 주장이다. 우리의 사고방식을 긍정적인 틀을 가지고 인식을 만들면 긍정적인 인식이 만들어 지고, 또 우리의 사고방식을 부정적인 틀을 가지고 인식을 만들면 부정적인 인식이 만들어 진다고 칸트는 생각했다.

칸트는 외부세계의 사실들이 우리의 인식을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고 외부세계로부터 우리에게 주어지는 사실들이 우리들의 인식의 틀을 통하여 가공해서 우리의 인식을 만들어 낸다. 때문에 우리가 행복해지려면, 외부세계가 우리에게 주는 조건이 우리가 행복하다는 인식이나 생각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행복에 대한 우리들의 인식이나 생각이 우리를 행복하게 만든다고 했다. 즉 칸트는 행복하다고하는 생각이 행복을 만들어 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칸트는 세상 모든 것이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는 하지 않았다. 마음이 중요하지만, 마음 뿐만 아니라 외부세계의 조건과 환경도 중요하다고 했다. 다만, 외부세계의 조건이나 환경 보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 들이는냐가 우리의 행복에 중요한 포인트가 된다고 했다.

예를 들어서 금전에 대하여 생각을 해보자, 돈 자체가 우리를 행복하게 하거나 불행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고 우리가 돈에 대한 우리의 인식의 틀이나 생각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한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면 돈을 싫어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누구나 돈을 많이 벌기 위하여 열심히 산다. 또 열심히 살 필요도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다만 우리가 지금 좀 더 행복한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지혜롭게 열심히는 살되 집착은 하지 말아야 된다고 강조하고 싶다. 그리고 건강에 대해서도 행복과 연관 지어서 생각해보자. 우리가 건강할 때에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건강에 대해서 그렇게 고마운지를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만약 건강이 나빠진다든지, 다른 사람이 건강이 안 좋아서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게 될 때에는 건강이 정말 중요하고 생각하게 되고 건강이 우리를 행복하게도, 불행하게도 만드는 것을 인식하고는 건강의 고마움을 가지게 된다. 물론 건강에도 집착을 하면 행복한 삶에는 나쁜 영향을 준다.

행복 노하우 셋,

나는 철학자 하이데거가 논한 행복론이 이 시대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위안이 될 수 있는 말씀으로 행복의 비밀을 말한 것 같다.

하이데거는 아픔이 없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왜냐하면 인생은 애당초에 고뇌가 있고 아픔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이데거는 실존주의 철학자인데 실존이란, 껍데기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질적으로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특히 인간의 주체적인 존재를 의미 한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실존하며 사는 것이 행복하게 사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 실존한다는 것이 무엇인가, 우리는 그저 존재하고 있을 수도 있고 실질적으로 존재할 수도 있다. 그저 존재한다는 것은 현존재로서 거기에 있다(there+be)는 의미로 지배하거나 이용 가능한 무비판적인 상태의 존재로 그냥 현존하는 존재을 말하며, 현존재는 비본래적인 존재라고 했다. 여기의 비본래적인 존재는 참나가 아닌 무상의 존재 즉, 언제가는 변화를 겪으면서 이 세상에서 사라져 가야하는 존재를 말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행복하기 위해서는 현존재가 아닌 실존(참된 나)하는 존재로 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이데거는 실존하기 위해서 죽음에 대한 관심을 이야기 했는데 그는 실존하는 존재로써 살고자 한다면 죽음을 겁내지 말고 부딪혀 보라고 말했다. 하이데그는 죽음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야 비로소 비본래적인 존재에서 벗어나 실존하는 존재로써 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요즈음 가끔 죽음체험, 임사체험을 하는 단체가 생겼고 그곳에 참여해서 자기가 죽었다고 생각하고 자기 관속에 직접 들어가 누워서 가만히 있으면 밖에서는 관에 못을 실제로 박는 것을 본 적이 있다. 그렇게 해서 잠깐 동안 관속에 누운 사람은 정적 속에서 있으면서 우리가 지금 살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소중하고 중요한가를 느낄 수 있게 하는 체험 행사 인 것 같았다. 살아 있는 오늘하루가 얼마나 절절하고 귀한 하루가 되지 않을까!

우리는 실존적인 존재로써 살아가겠다는 결단을 통해서 새로운 삶의 창조적 원천으로 삼아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하이데거는 진정한 행복은 아픔으로부터 찾아 온다고 하면서 아픔을 피하려고만 하지 말고 수용하고 넘어서라고 했다. 내일 죽는다고 생각하고 오늘이 마지막 날인 것처럼 살아간다면 이 순간순간이 얼마나 의미 있고 소중하고 행복한 시간이 되겠는가, 그리고 아프지 않는 삶은 진정한 삶이 아니다라고 하이데거는 주장했는데 이러한 사고체계로 어떠한 어려움이나 괴로움도 이것은 사람이 살아가는데 필시 존재하는 것들이며 이런 어려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나는 진정으로 인생의 참맛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구나!’하는 생각을 가지고 산다면 이 또한 행복한 삶이 아니겠는가! 이것이 철학자 하이데거가 말한 행복 노하우다.

(노자가 말한 상선약수의 삶과 거의 같다.)

철학자 세분의 행복론을 전달은 했지만 조금은 학문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이다. 저자는 행복한 삶이 어떻게 사는 것인가?’라고 질문을 받는다면, 간단하게 행복하게 산다는 것은 나 자신을 알고, 보람 있는 일을 하며, 재미 있게 살며 그 과정을 즐기면서 늘 기뼈하며 살아가는 삶이라고 대답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