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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형구 교수의 글

마음의 표정 10. 감이후지

마음의 표정 10. 감이후지(坎而後止) : 구덩이를 만나면 넘칠 때까지 기다린다


  신흠(申欽; 1566~1628)이 1613년 계축옥사(癸丑獄事) 때 김포 상두산 아래로 쫓겨났다. 계축옥사는 대북 일파가 소북을 축출키 위해 영창대군을 옹립하려 했다는 구실로 얽어 꾸민 무고였다. 그는 근처 가현산에서 흘러내린 물이 덤불과 돌길에 막혀 웅덩이를 이루던 곳에 정착했다. 먼저 도끼로 덤불을 걷어 내고, 물길의 흐름을 띄웠다. 돌을 쌓아 그 위에 한 칸 띠집을 짓고, 내리닫는 물을 모아 연못 두 개를 만들었다.


  한 칸 초가에는 감지와(坎止窩)란 이름을 붙였다. 감지(坎止)는 물이 구덩이를 만나 멈춘 것이다. 『주역』에 나온다. 기운 좋게 흘러가던 물이 구덩이를 만나면 그 자리에 멈춘다. 발버둥을 쳐 봐야 소용이 없다. 가득 채워 넘쳐흐를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애초에 구덩이에 들지 말아야 했으나, 이것은 물의 의지 밖의 일이다.


  가파른 시련의 습감괘(習坎卦) 다음에는 오래되어 막힌 것이 다시 통하는 형상의 이괘(離卦)가 기다린다. 역경 속에서 내실을 기해 신실함을 지키면, 다시 기회를 얻을 수 있다. 섣부른 판단으로 지레 포기하거나 소극적으로 움츠러들기만 할 일은 아니다.


  정치적 실의와 좌절에 처해 『주역』의 논리를 빈, 자기 다짐의 우의(寓意)가 깊다. 시련의 날에 하고 싶은 말이 좀 많았겠는가? 하지만 꾹 참고 주변을 정리했다. 습지의 물길을 틔워 쓸모없던 땅에 새 터전을 마련했다.


- 달아난 마음을 되돌리는 고전의 바늘 끝_『일침(一針)』, 정민,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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